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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기억해주는 것들

by 미대아빠 2024. 1. 7.

예술가의 감성템: 조각도, 나무작품, 붓

초심(初心)을 기억하기란 참 어렵다. 그동안 빼곡히 쌓아왔던 날들을 가끔 동경할 때가 있다. 가만히 눈을 감고 떠올려야 지나간 장면들이 기억되지만 사실 부지런하게 움직였던 손은 이미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 ‘예술가’의 꿈을 위해 처음 만난 4절 도화지를 시작으로, 입시 미술을 거쳐 ‘공예학’을 전공했을 때는 세상의 모든 물질이 나의 화폭인듯했다. 마치 세상의 ‘연결자(連結者)’가 된 느낌이었다. 다음 전공이었던 ‘서양화’ 또한 그 느낌을 담아 자유로운 작품활동을 해왔던 것 같다.

 

 

새로운 작품을 시작할 때마다 언제나 긴장과 설렘이 공존한다. 구름 같은 새하얀 드로잉북과 캔버스를 마주할 때, 선뜻 다가가기 힘들면 며칠째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때도 있다. 때로는 발버둥에 가까운 작업을 시작하기 위해 쇠붙이만큼 무거운 붓보다 먼저 글을 써보기도 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을 위해 움직이는 것들을 가득 담기도 한다. 길게만 느껴지는 이 시간에 손에 익은 도구와 오랜 친구 같은 작품을 마주하고 있으면 온전히 혼자 감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위로의 느낌이 든다.

 

작업 전, 익숙한 도구를 살피고 만지작거리는 것은, 지금까지 그들과 ‘협업’을 통해 층층이 쌓아온 묵직한 향기와 굴곡의 촉감으로 안정을 누리는 시간이다. 마치 피젯 토이(Fidget Toy)로서 훌륭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또 작품 작업 중 손끝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온전히 도구에만 맡겨질 때가 있는데, 그 역할을 함께 해주는 그것과의 예열 시간이기도 하다. 내 작품의 가장 큰 관객이 ‘나’이듯이, ‘나’의 작업을 가장 많이 관찰하고 기억해주는 것이 나의 반려 미술도구와 곁에 있는 작품들이다. 작품 작업은 격한 감정 운동이기 때문에 페이스메이커와 같은 이들이 있어서 지치지 않고, 끝을 계획할 수 없는 작품도 무사히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것 같다.

 

이십년지기 – 조각도

조각도는 대학 시절부터 20년 동안 내 곁을 지키고 있는 또 다른 ‘손’이다. 이 오래된 친구를 보고 있으면 함께 보냈던 시간이 생각난다. 아무 말 없어도 편안한 친구처럼, 보고만 있어도 뿌듯한 느낌이 든다. 조각 작업을 하지 않아도 사진첩 뒤적이듯 하나하나 살펴보고 닦고 기름칠하며 힐링 타임을 갖곤 한다.

 

최근 몇 년간 가장 많이 만지는 것은 아마도 휴대전화겠지만, 작품 작업에 있어서 휴대전화는 사실 ‘독(毒)’과도 같은 존재이다. 예술적 영감받을 곳이 너무나도 많은 세상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자신에게 집중하지 못하게 되는 때도 있다. 주변의 많은 것이 편리하게 변하고 있으니 어렵게 작품활동을 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조각도는 ‘지금 하는 작업이 맞다’고 얘기해주는 것 같다. 내가 감당할 길고 긴 시간, 작업을 묵묵히 기다리면서. 때로는 작업 도구들이 거울과 같은 존재 같다. 정답없는 문제해설처럼 이유를 찾아가며 내 방법이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작업하다 다친 손의 흉터들은 색이 흐려지며 사라졌지만, 조각도에 남아있는 상처들은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누군가 예술적 철학을 물었을 때 “위로를 위한 손길”이라고 답할 수 있는 것도, 이 친구들에 대한 마음이 조금은 반영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시간의 향과 감촉을 품은 – 나무작품들

나무는 원목을 재단하고 열두 번의 계절을 거쳐 자연건조 해야 좋은 작품재료로 거듭나게 된다. 나무가 원래 있던 환경과 유사하게 유지하는 자연건조 방법인데, 예술가에게도 이러한 자연건조와 같은 ‘대기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예술적 열등감이나 무기력감에서 벗어나 열정과 갈망을 되찾아주는 시간이고, 나침판이 원래 자리를 찾게 해주는 고요한 기다림이다. 나의 여러 작품 중에 나무로 만든 작품들은 이러한 시간을 가득 담고 있다. 톱질하고 조각하고 다듬고 칠하는 과정을 통해 완성된 목공예 작품은, 손이 스쳐 가는 촉감에 따라 하나하나 세세히 그 시간을 기억하게 한다. 감사하게도 작품 속 나무는 그때의 향과 감촉을 그대로 품고 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내가 생각하는 것, 고집하는 것이 과연 맞나? 나도 더 많이, 빠르게 변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조급한 마음을 슬며시 잡아주기도 한다.

 

감정 저금통 – 정이 깃든 붓들

10대부터 함께 해온 붓들은 나에게 예술적 상징과도 같은 물건이다. 대학 시절 어렵게 마련한 작업실에서부터 오랜 타지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만든 ‘예술다방’이라는 공간, 그리고 현재 작품활동까지 함께하고 있는 오랜 친구이자 파트너다. 오랜 시간 만큼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붓들은 작품 속 슬픔과 환희를 함께 나누었던 ‘감정 저금통’과 같다. ‘붓에 알맞은 손’을 만든다고 손에 꼭 쥐며 잠들던 어린 예술가의 패기도 아마 추억하고 있을 듯하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지만 그때는 진심이었다. 보잘것없는 나의 작은 손으로도 값진 것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순간도 이 붓들과 함께였다. 붓과 물감이 만나는 얇은 소리, 캔버스에 닿는 찰나의 짧은 떨림, 색이 혼합되며 내는 작은 눈부심 같은, 설레는 순간들을 익숙한 붓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받으면서 말이다.

 

‘예술은, 그(예술)에 대한 기쁨을 나누고 세상을 위로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예술교육가로서 나름대로 짙게 물들이며 살아가고 있다. 일상의 기록, 순간순간의 감정이 남긴 흔적조차 ‘예술 활동’이라는 생각으로, 중요한 삶의 에너지인 예술가의 역할 또한 충실히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기억을 기억해주는 것들’은 사실 사소한 예술가의 기록이나 흔적을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마치 달콤한 열매 안에서, 아무도 모르게 피어나는 무화과꽃의 소중함을 알고 있는 무화과나무처럼.

 

 

2023.02.27